[한겨레/세상읽기] 유고슬라비아의 비극 _ 송상용

1980년대에 나는 사회주의 나라들을 여섯 곳이나 가 보았다. 81년 부쿠레슈티 국제과학사 회의에 갈 때 빈에서 루마니아 비자를 못 받은 나는 쫓겨날 각오를 하고 비행기를 탔다. 공항에서 두 시간 기다려 비자를 받았다. 87년 케임브리지에 한 해 머무는 동안 세 나라를 더 찾았다. 헝가리와 중국은 힘겹게 비자를 받았는데 유고슬라비아는 달랐다. 런던의 대사관을 찾으니 영사는 외교관계가 없어 비자는 안 되나 국경을 통과하는 시간을 알려 주면 연락해 놓겠다고 했다. 가면 자기 고향 플리트비체를 꼭 보라고 했다.

 

기차로 오스트리아에서 국경을 넘었다. 과연 출입국 직원이 비자를 주었다. 20시간 만에 내린 곳이 아드리아해 항구도시 스플리트였다. 5달러짜리 민박에서 자고 메슈트로비치 미술관과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안의 궁을 본 다음 버스로 아슬아슬한 해안 절벽 위로 난 길을 달렸다. 피오르 다음으로 굴곡이 심하다는 해안은 절경이었다. 과학철학 세미나가 열린 두브로니크는 ‘아드리아해의 진주’로 불리는 잘 보존된 중세도시였다. 회의를 마치고 보름 동안 마케도니아를 뺀 다섯 공화국을 누볐다. 1달러씩 내고 일류 오페라와 발레를 즐겼다. 술집에 가면 으레 옆 사람이 한잔 샀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사람들이었다.

 

두 곳이 특히 인상 깊었다. 영사가 추천한 플리트비체는 16개의 호수가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환상적인 숲이었다. 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에는 네레트바강 협곡의 급류 위로 아름다운 무지개 돌다리가 있다. 터키가 지배하던 16세기에 건설된 이 다리는 한 번 무너진 뒤 다시 무너지면 장인의 목을 베겠다는 술탄의 협박을 받고 성공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다리 건너 터키 바자에는 70년대 마포 불고기 동네처럼 연기가 자욱했고 마늘·고추로 양념한 고기 맛이 일품이었다.

 

유고슬라비아는 남슬라브 나라라는 뜻으로 2차 대전 때 파르티잔을 이끌고 독일·이탈리아군을 격퇴한 영웅 티토가 1945년에 세웠다. 인민 대다수가 슬라브족이지만 여섯 공화국이 모두 다른 배경을 갖고 있어 발칸에서도 가장 복잡한 나라였다.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는 오랫동안 독일·이탈리아의 영향 아래 있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기에 가톨릭이다. 세르비아·몬테네그로는 오랜 왕국의 전통을 가진 정교도 나라이고 러시아와 가까웠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마케도니아는 터키 지배 아래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이 많다. 티토는 코민테른을 탈퇴하고 독립노선을 걸었지만 스탈린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영도력을 발휘해 유고슬라비아는 그가 타계한 뒤에도 10년 이상을 버틸 수 있었다.

 

유고슬라비아는 91년 세르비아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를 공격하고 두 나라가 독립을 선언하자 깨졌다. 명분 없는 내전은 보스니아, 코소보로 번지면서 10여년 수십만의 사상자를 냈다. 플리트비체가 있는 크라이나는 크로아티아 안의 세르비아인 지역이다. 자치를 요구하던 크라이나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한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는 세르비아가 인종청소를 자행했고 크로아티아도 가세해 무지개 다리를 폭파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밀로셰비치(세르비아), 투지만(크로아티아)이라는 두 파시스트가 겨룬 민족상잔의 비극이었다.

 

5년 전 다시 옛 유고슬라비아를 찾았다. 플리트비체는 혈투 흔적 없이 여전히 아름다웠고, 포격을 당한 두브로브니크도 잘 복구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난 달 세 번째로 갔을 때 크게 변한 스플리트의 모습은 서글펐다. 한산했던 디오클레티안궁은 거대한 쇼핑센터로 바뀌었고, 호텔·식당은 이탈리아보다 비쌌고 바가지가 판을 쳤다.

 


송상용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