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례/세상읽기] 임동원의 두 얼굴 _ 송상용

6월10일 임동원 회고록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임동원은 20년 가까이 통일과업에 몸바쳐 6·15 남북 정상회담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잠깐 들른 이 모임의 축사에서 백낙청 교수는 임동원을 “군인 같지 않으나 군인다운 사람”이라고 평했다. 임동원은 6·25 때 사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와 53년 육사에 들어갔다. 80년 전두환이 그의 군복을 벗기고 “다 참모총장이 될 수는 없는 거 아니냐”고 위로했을 때 그는 몹시 섭섭했다. 그는 27년 동안 철저한 군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경력이 있다.

 

임동원은 서울대 철학과에 편입해 61년 졸업했다. 내 1년 선배였다. 그는 4·19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독일철학에 심취했고 졸업논문 ‘하이데거의 언어문제’를 썼다. 5·16 쿠데타에 놀라 육사로 달려간 나에게 그는 곧 체포될 것 같다고 했다. 군사정권이 굳어지자 그는 잠시 중앙정보부에 차출되었다가 육사에 창설된 비교사회과학과에서 공산주의 비판이론과 대공전략론을 강의했다. 임동원이 67년 낸 을 나는 미국에서 받아 친구들과 돌려 보았다. 이듬해 1·21 청와대 기습미수 사건을 예언한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그를 스타덤에 오르게 했다. 명쾌하고도 치밀한 논리를 펴나가는 그의 글에서 철학도 임동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임동원은 자신의 생애가 10년 주기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60년대에는 반공이념, 반 게릴라전 이론을 연구·교육했고, 70년대에는 합참과 육본에서 군사전략통으로 자주국방(율곡계획)을 추진했다. 그는 80년대 외교관을 거쳐 91년 남북 기본합의서를 이끌어내는 데 큰몫을 했다. 김일성 주석의 급서 직전 그는 김영삼 선배와 함께 남북 정상회담 예행연습을 하기도 했다. 94년 김대중과의 만남은 큰 전환점이었다. 임동원은 아태평화재단에서 디제이의 3단계 통일론을 보완해 대북 포용정책을 체계화하는 작업을 했다. 햇볕정책의 설계사·전도사로서 그가 성사시킨 2000년 공동선언은 남북 화해협력의 물꼬를 튼 역사적 사건이었다. 임동원이 냉전기에 평화를 유지하는 ‘피스키퍼’에서 전환기에 ‘피스메이커’가 된 것은 단순한 변신이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반세기 동안의 깊은 연구와 외교·안보·통일 분야의 풍부한 경험에서 나온 일관성 있는 철학의 산물이었다.

 

쇠고기·대운하에 가려 잊혀진 이명박 정부의 심각한 문제가 대북정책이다. 남북관계는 실용의 잣대로 풀어가겠다던 이 대통령의 취임사가 무색하게 정부는 실용주의와는 거리가 먼 방향에서 주춤거리고 있다. 북핵 협상은 급진전하는데 남북관계 경색은 깊어지고 있다. 북핵 연계론에 매달려 이대로 가다가는 김영삼 정부의 잃어버린 5년이 되풀이될 것이 뻔하다. 36년 공들여 쌓은 화해협력의 기본틀을 계승하지 않는다면 이명박 정부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되돌리는 죄를 범하게 될 것이다.

 

대통령의 남북연락사무소 설치 제의가 먹혀들어가지 않더니 옥수수 지원도 거절당해 체면만 구겼다. 이러다가 한국은 6자 회담에서도 왕따가 될 가능성이 높다. 출판기념회에 나온 김하중 통일부장관이 개인자격으로 축사를 하는 것은 보기에 딱했다. 우여곡절 끝에 6·15 여덟 돌 기념행사에 참석했다는 그의 축사도 대폭 깎였다는 소문이다. 김 장관은 정부 안에서 당당히 소신을 주장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사표를 던지는 것이 옳다. 정부와 여당 관계자들은 모름지기 ‘대북관계의 바이블’ 를 ‘밤새워 읽고’ 제대로 된 대북정책을 세울 일이다.

 


송상용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