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례/세상읽기] 예방원칙, 전문가주의 동물권 _ 송상용

광우병 소동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편할 수가 없다. 1980년대 후반 소가 미치기 시작한 영국에서 1년 넘게 살았기 때문이다. 잠복기가 10년이라지만 40년이란 주장도 있다. 그래서 나는 헌혈할 자격도 없다. 광우병에 걸릴 가능성은 로또에 당첨되어 돈 타러 은행에 갔다가 벼락 맞아 죽을 확률이라고 말하는 과학자가 있다. 비슷하게 핵 발전도 안전하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일어나고야 말았다.

 

얼마 전 한국을 찾은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가 이제는 우리 사회에서도 낯설지 않게 되었다. 70년대 초 독일·스웨덴에서 나온 ‘예방원칙’은 위험평가·위험관리에서 과학적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전략으로 자리를 굳혔다.

환경문제·나노기술 등에서 ‘치료보다 예방’이라는 모형은 필수다. ‘고요한 봄’을 가져온 살충제 ‘디디티’나 1만여명의 기형아를 낳게 한 ‘탈리도마이드’는 유명하다.

 

석면의 경우는 19세기 말에 이미 그 유해성에 대한 초기 경고가 있었다. 석면 가루가 폐암의 원인이라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계속 끌다가 100년 만인 1998년에야 금지되었다. 예방원칙을 진작 적용했더라면 수십만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광우병은 프리온이라는 변형 단백질이 병원체인 특이한 병으로 21세기에 들어서야 그 정체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이 병에 관해 과학은 너무나 모르는 것이 많다. 성급한 단정을 삼가고 신중히 접근해야 하는 이유다. 광우병에 감염될 위험이 있다는 과학적 증거가 확실하지 않더라도 예방조처를 취해야 한다는 말이다.

 

광우병 문제가 뜨겁게 된 것은 ‘피디수첩’과 촛불문화제 때문이었다. 무기력한 야당과 소극적인 시민단체를 제치고 비판언론과 10대가 일어선 것이다. 일부 과학자와 보수언론들은 과학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며 정치가 끼어들거나 대중이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것은 과학의 본질을 모르는 데서 나온 잘못된 생각이다. 400년 전만 해도 과학은 서재나 실험실에서 하는 고독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라비츠가 말한 대로 순수과학은 원자폭탄과 더불어 끝났다.

과학은 사회의 산물이며 사회를 바꾸기도 한다. 따라서 과학은 과학자의 전유물일 수 없다. 과학은 모든 사람들의 일이 되어 버렸다. 인문·사회과학자나 일반시민들이 과학에 대해 발언하고 간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광우병 파동의 시작은 정상회담 전날 한국이 미국에 준 선물이다. 이것은 과학인가 정치인가? 3년 전 황우석 사건 때도 똑같은 과학자들의 문제제기가 있었다. 스타 과학자 황우석이 과학 아닌 정치쇼로 온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었는데도 일부 과학자들은 참견 말라는 헛소리를 했다. 마무리는 젊은 과학자들의 검증으로 되었지만 희대의 과학 사기 혐의를 제기하고 용감하게 싸운 것은 몇 안 되는 생명윤리학자, 과학기자, 피디들이었다. 전문가주의는 시대착오일 뿐 아니라 위험천만하다.

 

광우병은 인간이 만든 병이다. 초식동물인 소한테 도살한 동물의 살과 뼈의 가루를 사료에 섞어 먹인 것이 화근이었다. 소에게 소를 먹이다니! 인간이란 동물은 이토록 잔인하다.


많은 나라들이 동물성 사료를 금지하고 있지만 이번 미국과의 합의문에서는 이 조처의 완화가 말썽이 되고 있다. 70년대에 동물 해방을 부르짖은 윤리학자 피터 싱어는 광우병·조류독감 때문에 소·닭·오리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것을 개탄한다. 인권이 중요하다면 동물의 권리도 인정해야 한다. 비인간적인 공업형 축산을 고발하는 소리가 높아감을 환영한다.

 


송상용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